벌써 얼마나 걸었는 지 모른다. 발 아래 엉키는 수풀을 칼로 쳐내면서 앞으로 걸어 나가는동안은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지독한 습기가 숨통을 조여 왔지만 무성한 나무에서 생성되는 신선한 산소덕분에 머릿속은 굉장히 맑았다. 벌써 3일 째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속은 잔뜩 뒤틀려 있었지만 지독하게 훈련되어 있는 몸은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시야를 가리는 수풀을 잘라내며 말없이 걷고 있는 동안 뒤 쪽에서 들리던 발자국 소리가 끊어진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어딘가에 발이 걸렸는 지 샨이 다리를 붙든 채 뒹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샨을 그저 내려다 보고 있다. 이안의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동자에 살기가 깃들기 전에 얼른 다가가서 샨을 일으켰다. “발목이 접질렸어.” “......” 엄살 같이는 보이지 않았다. 일으키려고 했던 몸이 내게로 기울어 지면서 흉하게 부어올라 있는 발목이 눈에 들어 왔다.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전에 넘어져서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짐이 되어서 버려 질 것이 무서워서 필사적으로 참아 왔을 거다. 에메랄드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잔뜩 실린다. 내 검은 군복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린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녀석들이 다가왔다. 사흘 째 굶주림 속에서 이 진창의 밀림을 헤매고 있던 녀석들에게서는 인간다운 감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 다친 건가. 샨.” 붉은 머리의 잭이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약간은 즐거움이 담긴 그 어조에 내 옷깃을 잡고 있던 샨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약하다고 인식되는 동시에 샨은 제거되어 질 것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궁지에 몰린 인간에게 있어 언제나 최대의 적으로 간주된다. “괜찮아. 별 것 아니야.” “그건...네가 판단한 문제가 아니지. 샨.” 진저가 총구를 샨의 머리에 겨냥하고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짧게 친 금발머리는 흙먼지로 인해 더렵혀져 있었지만 총구 끝만은 반들반들하게 빛나고 있었다. 돈이라는 단순한 목적을 가지고 모인 용병들에게서 동료에 대한 의리라는 걸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충분히 예고 되었던 장면이었지만 지금 필사적으로 나를 잡고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샨이었다. “내가 책임진다.” 최대한 짧게 내 뱉은 뒤 샨을 내 가슴 안으로 끌어당기자 여러 개의 총구가 동시에 나에게 겨누어 진다. 붉은 머리의 잭이 느글거리는 낯짝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총부리로 내 얼굴을 툭툭 치며 빈정거렸다. “하하. 이 거 뭐야. 류. 너 돌았냐. 지금 이 커다란 짐덩이를 지고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또다시 끔찍한 괴물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이 지긋지긋한 밀림 속에서 낙오자 따위를 끌여 들여서 어떡하겠다는 건데? 뒤지려면 혼자서 뒤져버리라고 그래. 그 녀석은 처음부터 걸리적 거리기만 했어. 다른 녀석들에게도 물어보지 그래? 식량만 축내는 그 녀석을 참아주느라고 모두 아주 폭발하기 직전이니까.." "그만 둬.” 초록색의 잎사귀 사이로 투과된 햇빛이 총부리에 반사되는 순간 철컥하고 총알이 장전된다. “왜? 너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잖아. 류. 잘난 척 하는 건 그쯤 해두지 그래. 적을 제거 하고 나서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이야. 나갈 구멍 다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킬러와는 달리 우리는 복잡하고 꽉 막힌 미로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가야 한단 말이다. 부상자 때문에 꾸물거리다가는 언제 죽어서 구더기한테 파 먹혀 버릴 지 몰라. 여기는 카오스의 숲이다. 류. 그러니까 그 같잖은 동정은 그만 두지 그래. 너한테는 전혀 안 어울리니깐.” 바짝 들이대고 있는 총구와는 달리 잭의 말투는 느긋했다. “.....샨은 동료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잭과 진저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잭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개까지 절재 절래 흔들며 물러나자 이번에는 진저가 다가왔다. 진흙 투성이에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 다듬어진 예리한 살기는 조금도 그 빛이 퇴색되어 있지 않았다. 말라버린 입술이 비틀린 순간 잔뜩 비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우리 중에서 너만이 그렇게 생각하지.” 노골적인 비웃음이 공기를 진동시켜 고막을 파고든다.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마친 진저가 잭나이프를 허리춤에서 꺼내든다. 나 역시 손목에 매어 뒀던 단도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아무말 없이 관망만 하고 있는 이안을 쳐다봤다. 리더인 녀석은 표정 없는 푸른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전투 용병인 가디언들의 가장 큰 약점은 응집력이 없다는 거다. 그렇기에 한 사람 한사람이 완벽한 프로페셔널이지만 단체로 움직이는 상황에서는 그런 강점 때문에 가장 많은 죽임을 당하는 이들도 가디언이었다. 정부는 그런 가디언들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마지막 안전장치로 능력자인 리더를 임명했다. 돌연변이로 태어난 능력자로 구성된 리더는 우리의 감시자인 동시에 힘의 구심점이었다. 리더의 자질이라는 것이 어떤 기준으로 책정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팀의 일원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이 상황에서 부상자를 마치 무기질처럼 쳐다보는 그에게 희미한 분노를 느꼈다. “그럼 너희들 끼리 가. 샨하고 나는 남겠어.” 아름다운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탁하게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날카롭게 피부를 찔러오는 살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전투방식은 조용했지만 그만큼 잔인했으며 냉혹했다. 엄청난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처음 팀의 리더로 임명 되었을 때 그를 둘러싼 수군거림은 기대감과 경외감에 가득 차 있었다. 최연소자로써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최고의 가디언. 하지만 그런 무성한 소문은 군내의 전투 뿐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해서도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안에 의해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훈련이라고 해 봤자 무언가 대강대강 설렁설렁 해치우는 느낌. 잠깐의 몸 풀기가 끝나면 그는 리더의 하얀 군복을 입은 채 훈련장 한 구석에 앉아 멍하니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외견만은 훌륭해서 그런 모습조차도 군내의 여자 대원들과 라쉬들의 한숨을 자아내게 했지만 맹목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비쉬들의 정복욕과 호승심, 열등감과 질투심을 자극시켰다. 동경에서 실망으로 그러다 노골적인 경멸로. 심지어 그를 숭배하고 있던 가디언들 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이안의 진짜 능력을 의심하며 그를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이안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감정도 가지고 있던 나조차도 팀의 구심점이라기보다 오히려 소실점의 역할을 하는 그가 리더의 자각이 없다고 판단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안이 가디언의 본분을 완전히 잊고 놀고만 있었다는 건 아니었다. 군 인사자들은 썩을 대로 썩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언제나 가장 크고 중요한 전투에서 그는 확실히 공을 세우고 있었고 누구보다 최전방에서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투의 방향을 결정 지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과가 팀 내의 비쉬들에 의해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이유는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전투 대신 마치 흥미진진한 게임이라도 하는 듯한 그의 느긋하고 특이한 전투 감각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선 능력자만이 가지는 여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투명한 실선을 유려하게 만들어 내며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적을 몰살시키는 그는 항상 침착하고 단정했으며 조용했다. 가디언들이 집착하는 용맹이나 힘의 과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자신이 처리할 분량이 대강 사라졌다고 판단되면 나머지는 다른 팀원들에게 맡긴 채 물러서는 게 이안의 버릇이었다. 군대처럼...그것도 단순한 다혈질의 용병들로 가득한 가디언들의 눈에 그런 그가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계속 되는 명령 불복종에 부대이탈. 심지어 전투에 관련이 없는 민간인 여자들까지 강간하는 녀석들을 알면서도 이안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들의 무시와 노골적인 경멸을 인지하면서도 줄곧 조용한 침묵만을 지켰다. 그리고 전투가 막바지에 다달아 승리를 눈앞에 뒀을 때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야 했을 그들의 몸은 이안에 의해 갈갈이 찢겨갔다. 습기 찬 밀림 속에서 거듭된 전투는 거칠고 잔인하며 치열했다. 프로라고 자부하는 그 많은 가디언들이 제대로 된 반항 조차 못하고 이안의 칼에 의해 신체가 조각 조각 분리 되어 갔다.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가기 직전 그들은 고통에 몸부림 치면서 이안 레이시하라는 이름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역겨움을 자아내는 피 냄새. 밀림의 습기가 허파까지 차올라 완전히 잠식당해 버릴 것만 같았다. 눈 앞 에서 흩뿌려지는 피와 갈기 갈기 찢겨진 시체를 멍하니 쳐다보다 기척을 느낀 그에게 응시 당했을 때 몸이 오그라드는 공포로 인해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떨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에게 목을 졸렸었다. “류! 저 녀석들 말대로 난 상관하지 말고 그냥 가. 지체할 시간이 없잖아. 네 발목을 잡아 끌어서 원망 듣기 싫단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가. 밤이 다가오기 전에.” 샨이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잔뜩 겁에 질린 주제에 강한 척 한다. 등골을 파먹는 공포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부상당한 몸으로 혼자 남겨진다면 이 위험한 숲에서 반나절도 살아남을 수 없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괴수와 파충류들에게 아득아득 몸뚱아리를 물어뜯긴 후 썩어 갈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류. 넌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지만 저 녀석은 아니야. 이 지긋지긋한 숲을 빠져 나가기 위해선 너 역시 필요해.” 진저가 여전히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채 힐끔 거리면서 이안의 눈치를 살핀다. 동조해달라는 거겠지. 가디언은 크게 3무리로 나뉘게 된다. 공격자인 비쉬와 방어자인 라쉬 마지막으로 저격자 스나이퍼. 근거리 접근 전에서는 공격자 비쉬와 방어자 라쉬가 한 짝이 되어 전투에 임하고 스나이퍼는 그들은 먼 곳에서 엄호한다. 그 중에서 나는 드물게도 비쉬와 스나이퍼의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샨이 라쉬이기 때문에 그동안은 비쉬로서 전투에 임했지만 라쉬인 샨 없이 없어지면 스나이퍼로 나를 써먹을 생각이겠지. “너희가 샨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다면 나도 더 이상 너희를 동료로 생각하지 않아. 샨에게 털끝 하나 건드리거나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면 그 전에 너희 목을 전부 따버릴 거다.” 내 목소리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으로 인해 진저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순간 쥐고 있던 칼로 총구를 잘라버린 뒤 팔꿈치로 녀석의 명치 부분을 가격하고 칼끝을 목 위 에 바짝 들이댔다. 잭은 진저가 당하자 망설이지 않고 내 관자놀이에 총을 들이대었고 샨은 내 소매를 힘주어 잡았다. 지독한 정적.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만 둬. 류. 나 때문에 이러지마.” “....너 때문이 아니야.” 샨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살기로 팽팽한 이 공간 속에서 위화감이 들 정도로 따뜻한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비참함과 함께 가슴 저린 감동을 느꼈다. 그래도 라쉬로서 그의 등 뒤를 지켜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깟 부상으로 그에게서 내 쳐질 까봐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인상적인 잿빛 머리카락과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류는 지독하게 무뚝뚝했지만 샨에게만은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는 다정한 녀석이었다. 차갑고 잔인한 가디언의 가면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 친구는 한 사람의 목숨을 앗을 때마다 죄책감에 괴로워 하며 혼자 안으로만 삭혔다. “아니. 나 때문이야. 나는 괜찮으니까 너는 가.” “.....너라면 그렇게 하겠니?” “......” 조용하게 가라앉은 류의 목소리는 단호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만 둬. 나를 알면서 그렇게 말 하지 마.” “닥쳐! 입에 곰팡이가 쓴 줄 알았는 데 오늘 따라 꽤 나불거리잖아. 류. 그렇게 주절 거릴 때가 아닐 텐데. 그리고 누구한테 협박이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 남아야 하는 게 팀의 규칙이라는 거 너도 잘 알겠지. 비정하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이렇게 입씨름 할 여유가 있다면 한 발자국 앞으로 더 걸어 가겠어. 그러니까 이 쯤 해두지.. 팀의 분열은 원하지 않아. 여기서 깨어지면 우리는 끝장이라고.” 다혈질의 잭이 붉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나름대로 냉정을 가장하고 말했지만 그의 총구는 아직도 나를 향하고 있었다. 피로과 공복에 지친 몸은 인내를 잊어 버리게 한다. 여기서 한 발만 잘못 움직이면 우리 다섯 중 누군가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 갈 것이 뻔하다. 실제 전투에서 사망하기 보다는 전투 후 분열된 팀원에 의해 살해 되는 것이 일반적인 가디언의 죽음 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한 안전 장치인 리더 이안이 침묵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숨통을 더욱 더 바짝 죄어 갔다. 그리고 그 균형은 나에게 공격을 받고 뒤로 물러나 있던 진저가 샨의 다리에 칼을 꽂아 넣는 순간 산산 조각으로 깨어져 버렸다. “류. 난 괜찮으니까...이거 네가 입어.” “......” 샨은 내가 벗어준 군복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런 녀석의 손을 무시하고 환부를 살폈다. 잔인하기로 소문난 진저 답게 샨의 허벅지는 십자 모양으로 깊숙하게 찢어져 있었다. 상처는 가장 효과적으로 벌어져 연신 붉은 피를 뿜어낸다. 붉은 피가 땅으로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지사제를 바른 후 압박 붕대를 감자 고통을 참는 신음 소리가 샨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진통제가 없다. 미안.” “.......네가 왜 미안한데. 류.....내가 칠칠맞게 다치지만 않았더라도...지금쯤 이 숲의 절반은 빠져 나갔을 텐데....진저와 잭하고 싸울 필요도 없었을 거고....네가 돌봐줘도 이런 몸이면 여기서 못 나갈 게 뻔한데 왜 남은 거야. 지금은 낮이라서 어떻게든 버티지만 곧 피냄새를 맞고 그것들이 다시 몰려 올거야. 아무리 너라도...그 괴물들을 혼자 상대할 수는 없잖아. 총알도 다 떨어져 가는데....대체 왜 남은 거야. 난 네 짐이 되기 싫어.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 지금까지도 충분하잖아. 그러니까 그만하지 그랬어. 네가 그대로 돌아섰다고 해도 나 티끌만큼 원망 안했을 거야. 당연한 거니까. 한사람이라도 더 살아야 하니까 납득하고 이해했을 거야. 이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안이 눈감아 줬어도 결국 우린 수배될 게 분명한데....나 때문에 진저를 그렇게 만들다니...제정신이야?” “말 많이 하지마. 창백하다.” “류!!!!” “....진저는 네 다리에 칼을 꽂았어.” “.....알아. 하지만...” “그래서 난 그 녀석의 다리를 잘랐다. 뭔가 잘못됐나.” “.....아니 하지만 전혀 너답지 않잖아.” “.......”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는 거 알아. 류. 비쉬이면서도 넌 사람을 베는 걸 무척 싫어한다는 것 잘 알고 있어. 네가 사람을 죽일 때마다 얼마나 괴로운 눈을 하는 지 뻔히 아는데.... 날 위해서 동료의 피를 손에 묻히다니....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 이상해......많이 기쁘지만....네가 내 쪽에 서준 건 정말 기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파. 진저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네가 걱정 돼..어째서 그렇게 까지 한거야.” “......그만 해라.”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고 되돌릴 수 없어. 너와는 상관없이 한 행동이야. 네가 아닌 그 누구라도 난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책하지 마.” “.....응”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는 류의 말에 샨은 명치끝이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진중한 말투와 그 속에 담긴 진심은 사람을 따뜻하게 감동시키고 아리한 아픔을 선사한다. 낮은 한숨을 쉬는 류를 바라보며 샨은 죄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지 자신의 상처를 살피는 류의 안색을 살피며 입술을 조그맣게 달싹거린다. 류는 그런 샨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심했어. 하지만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낙오자는 당연하게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녀석이니까...스스로 납득하겠지. 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고.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응.” “낙오자는 없어. 버려지는 자는 있을지 몰라도.” “....하지만 모두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명 모두를 위한 전투를 해. 실상은 어떨지 몰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평온하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힘으로라도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적을 죽이고 살아있는 자신의 양심과 인간성을 죽여.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믿어야만 하는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해?” “.......” “모두를 위해서 누군가를 당연히 희생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모두는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어째서 잊고 있는 걸까?” 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결코 가디언이 입에 담을 만한 말이 아니었다. “죽어도 당연한 생명은 없어. 소중한 목숨과 그렇지 않은 목숨도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왠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건 자신이 버려질 목숨이었기 때문일까 하고 샨은 생각했다. 류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마친 뒤 샨의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은회색의 눈동자는 불투명하게 보였지만 언제나처럼 아름다워서 샨은 또다시 자연스럽게 설득 되어 버렸다. 파트너 로서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다정함에 짜릿한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언제 잃어버릴지 몰라 초조하고 안타까웠다. 진저가 샨을 공격했을 때 이안의 말없는 관망아래서 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저의 다리를 잘라 버렸다. 누군가가 말릴 틈도 없이, 진저가 신체가 분리되는 아픔에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류는 전투 때처럼 순식간에 상대의 공격력을 빼앗아 버렸다. 검은 군복을 입은 류의 냉정하게 가라앉은 회색의 눈동자와 하얀 피부는 붉은 피의 분수 속에서 더욱 투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가끔씩 보여지는 모습에 류라는 인간의 본질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를 평가했고 쉽사리 규정지어 버렸다. 최대한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는 류를 민간인을 비롯해 같은 가디언들 까지 그를 지키는 자(guardian)가 아닌 살육자(killer)라고 불렀다. 진저가 쓰러지자 잭이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지만 그 누구도 어떤 선에서 멈춰서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리더인 이안 조차도. 바닥을 뒹굴며 신음을 내지르는 진저와 그런 그를 무감정한 눈동자로 내려다 보는 류. 공포에 떨고 있는 샨. 그런 모두를 팔짱만 낀 채 관망하는 이안. 모든 것이 이 숲처럼 비정상 적이었다. 그 상황을 종식시킬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은 리더이면서 능력자인 이안이었지만 그는 사파이어가 무색할 정도로 푸른 눈동자로 그저 지켜만 뿐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리더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그 자리에서 팀의 분열의 초래한 샨과 류를 제거했어야 하는데도 팀에서 떨어져 나오는 그들을 무시했다. 상처가 쑤셔 오는 것을 참아가며 샨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던 이안에 대해 떠올렸다. 이안 레이시하. 16세에 전투 가디언이 되고 19세 때 이미 정부군 최고 장교가 된 그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지만 고위 귀족의 혈통일 거라고 모두 생각했다. 엷은 갈색머리와 심연의 바다빛 눈동자, 군인 답지 않은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피비린내를 풍기는 살육자 치고 지나치게 매력적인 존재 였으며 전투 용병인 가디언의 대다수가 그의 전투를 가장한 살육을 동경해서 군에 입대 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이 쪽 계통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며 강한 사내들의 지향점 이었다. “먹을 걸 구해 올게.” “.....아.” 멍하게 이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류의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자 류가 그런 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곧 올테니까 걱정마...’ 류는 무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는 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숲 속으로 사라진다. 샨은 그런 류의 모습을 보자 다리의 상처보다 가슴이 더 욱신거리며 쑤셔 왔다. 어떡하다가 이 꼴이 되었을 까. 계기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기인했다. 비쉬(공격자)와 라쉬(방어자)는 전투 능력에 의해서도 구별 되어 지지만 그보다도 먼저 성격적 성향에 의해 나누어지게 된다. 공격적이면서도 차분한 이성의 소유자는 공격자 비쉬로 수동적이며 온화한 유전자와 감정적인 면이 강한 인간은 방어자 라쉬로 구별지어진다. 라쉬는 여성적인 성향으로 팀 내의 분열이 일어났을 때 그 원활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동시에 전투와 살인에 대한 스트레스로 비쉬(공격자)가 정신적 한계에 다다랐을 때 그 정신적 균형을 위해 필요한 존재 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비쉬(공격자)가 전투 스트레스가 극도에 다다랐을 때 표출되는 육욕을 충족 시켜줘야만 하는 존재가 라쉬(방어자)였다. 보통 그 대상은 페어를 이룬 비쉬에 국한 되는 것이었지만 팀 내에 라쉬(방어자)가 모두 사망했을 시에는 팀의 모든 비쉬(공격자)의 교미 상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그 들 사이에 불문율이었다. 현재 자신과 페어를 짜고 있는 류는 전혀 그런 관계를 요구해 오고 있지 않았지만 팀 내에 샨을 제외한 라쉬가 전부 사망해 버림으로써 샨은 팀 내의 비쉬들의 맛좋은 욕구 배출구로인식 될 수 밖에 없었다. 페어지만 공격자인 류와 자신의 입장은 다르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품지 않는 다 해도 다른 비쉬들이 원하면 언제라도 다리를 벌려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는 이상 함부로 몸을 내어 주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라 샨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달려드는 놈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전투 때 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 라쉬로서 가디언에 입대한 주제에 순결 운운하는 건 확실히 비웃음을 살만한 짓이었지만 류가 자신을 봐주건 봐주지 않건 그도 건드리지 않는 몸을 단지 라쉬라는 이유로 다른 놈들에게 짓밟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전투라는 것은 언제나 예측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각지도 않은 기습을 받게 되는 가 하면 목이 떨어지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구출되기도 한다. 그 날의 전투도 그랬었다. 게릴라전을 연상시키는 기습적인 공격에 적들의 몸이 갈기 갈기 찢겨 갔다. 능력자인 이안을 필두로 그 오른 쪽엔 류, 왼 쪽에는 잭. 스나이퍼로서 진저와 라쉬인 샨이 한 팀이 되어 더할 수도 없게 적들을 참혹하게 몰아 붙였다. 흩뿌려 지는 피의 홍수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면서 적들을 하나 둘 꺽어 나가는 동안 샨은 비록 라쉬였지만 군인으로서 더할 수 없는 승리감에 젖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 부터였다. 라쉬로서 익숙하지 않은 승리감에 취한 샨이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 비쉬(공격자)의 역할을 하려는 순간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던 균형은 우스울 정도로 한순간에 깨어져 버렸다.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로 한순간에 군인들의 전투가 개별의 가디언의 살육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류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필사적이었다는 걸 샨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건 전투에서 남의 목숨까지 걱정할 여유는 없어지는 법. 자신 때문에 자잘한 상처를 입어가는 류를 보다 못한 샨이 무리에서 떨어 진 후부터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 쳤다. 자신 있는 방어 능력을 앞세워 지옥 같은 피바다에서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을 추격하는 무리들. 적과 아군을 불문하고 살인의 광기에 사로잡인 비쉬들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라쉬들에 대한 사냥을 시작했다. 샨은 허파가 말라버리기 직전까지 도망치다 뒷덜미가 잡혀서 수풀 속에 처박혔다. 그리고 나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거칠어진 누군가에 의해 발목이 꺽여졌을 때 여린 몸은 더 할 수 없이 참혹하게 유린 되어 지기 시작했다. 애널이 거대한 흉기에 의해 잔인하게 쑤셔지고 강한 사내내가 나는 하얀 정액이 꾸룩거리면서 뱃속을 가득 채워진 후에도 미친 사내들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입과 아래를 통해 몸 안으로 지속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정액이 한계를 넘어 애널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샨의 입에 붉은 캡슐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샨은 무의식 중에도 그것을 뱉어 내려고 했지만 곧이어 목안으로 흘러 들어온 정액과 성기에 결국 삼킬 수밖에 없었다. 길고 긴 육욕의 시간이 지난 후 샨은 눈을 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상황을 기억해 냈다. 이곳은 전장이라 아무도 그를 지켜 줄 수 없었다. 류와는 낮의 전투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류가 그의 곁에서 멀어진 시점에서 비쉬들은 잔인한 육식동물이 변해 약한 그를 집단적으로 잡아 먹었다. 몸 아래를 내려다 보자 온 몸은 사내들의 오줌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허벅지 사이는 정액과 피로인해 참혹하게 물들어 있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한 두 번 당해본 일도 아닌데 눈앞이 아찔해 지면서 억울함과 분노로 인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버린 발목을 억지고 짜 맞추면서 샨은 문드러진 자존심과 끔찍한 고통에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물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몇 백 미터나 기어간 후 간신히 자신의 몸을 닦으면서 샨은 약간 부풀어 있는 자신의 아랫배를 만졌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아무리 긁어 내려고 해도 이미 몸속에 가득 찬 정액은 서로 응결되어 조금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왠지 눈물이 났다. 라쉬로서 강간당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가디언으로서 입대하자마자 그 상급자를 비롯해서 페어를 짰던 비쉬들에게 언제나 당하던 일이라 육체적 고통 말고는 그다지 고통 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제의 그 짐승들은 자신에게 가장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흔적을 남기고 갔다. 행위 중 사내들이 먹였던 그 약....은 시하임(번식을 위한 임신 촉진제)임이 틀림없다. 가디언들은 최고 군인인 만큼 우수한 인간들만 선발된다. 그 우수한 유전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전투에서 죽어버리는 손실을 염려한 정부는 남성도 임신할 수 있게 만드는 약 ‘시하임’ 을 개발했다. 생존만큼 강한 욕구로 설명되는 성욕은 죽음으로 인한 공포로 미쳐 버린 인간들을 지배하고 그 아래에서 라쉬들은 희생된다. 군인이면서도 여성의 역할을 강요받는 라쉬들은 반 미쳐버린 비쉬들에 의해 강제로 약을 복용한 뒤 몸 안에 가득찬 정액과 자신의 피로 생명을 만들어 낸다. 지금 샨의 몸 안에 남아있는 수십 명이나 되는 남자의 정액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유전자는 그 누구보다 강력한 생명체를 만들어 내겠지만 그 모태가 되는 샨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 먹을 것이다. 남자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최고의 모욕. 아무리 그런 취급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도 라쉬 역시 어디까지나 엘리트 군인이었다. 후에 아무리 엄청난 보상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굴욕을 끝까지 견디는 인간을 드물어서 출산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그 아이를 죽여 버리거나 출산 전에 자살해 버리기가 일수 였다. 그리고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능력은 태어나는 아기에게 고스란히 빼앗겨 버리기 때문에 가디언의 신분을 잃고 보통의 민간인이 되어 버린 상태에서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의 노리개로 농락당하다가 끝내 살해당하는 것이 수태를 한 일반적인 라쉬들의 삶이었다. 패배자이긴 싫지만 샨 역시 그렇게는 되는 것 역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죽어 버리려고 군화 사이에 끼워 두었던 단검을 들고 목을 그으려고 했을 때 마치 달콤한 환상처럼 류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잘생긴 얼굴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 있고 검은 군복이 피를 머금어서 무거워 보였지만 그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맨손으로 칼날을 쥔 채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자신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챈 류의 미간이 찌푸려 졌을 때 샨은 류의 얼굴에 난 상처가 전투에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 나뭇가지에 긁힌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자잘한 생채기들이 그가 자신을 찾기 위해 그만큼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샨은 기뻤다. “그러지 마.” “........” “죽으면 안 돼.” “........” 나도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 자신이 없어. 더구나 네 옆에서. “......너는 이해 못해. 류. 그러니까 나는 내 의지대로 행동할거야.” “....그럴지도 몰라.” 칼날을 쥔 류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감에 따라 붉은 선혈이 바닥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그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샨을 쉽게 칼날을 돌릴 수 없었다. 한순간의 감상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동정한다고 해서 이미 손에 잡힐 것처럼 정해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는 싫었다.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는 지금 네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지 못해. 하지만 너 역시 마찬가지다.” “....?....” “나는 네가 다친 게 마음이 아파.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려는 너 때문에 가슴이 따끔거려. 하지만 너는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하잖아? 본인이 아닌 한 그 사람 만이 가진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유할 수 없다고 생각해.” “.........” “그렇게.....이해까지는 못해도....적어도 지금처럼 스스로를 포기할 마음이 들지 않게 옆에서 도와 줄게. 그 걸로는 안 되겠어?” “.......” “.......” “...진심이야 그 말? 내가 어떤 꼴이라도 경멸하지 않을 자신 있어? 떠나지 않고 내 옆에 있을거야? 잘 생각하고 대답해. 네 말 한마디에 대책 없이 기대버릴 지도 몰라. 그거 알고 하는 말이야?” “.......그래. 진심.” 따뜻한 목소리와 다감한 회색의 눈동자가 지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싼다. “네가 원하는 만큼 기대도 좋아. 이런 나로 괜찮다면 얼마든지.....그러니까 이제 이거 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진중한 말 하나하나에 서서히 녹아간다. 마침내 샨이 완전히 손에서 힘을 빼자 류도 칼날을 쥐고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툭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나이프에서 붉은 피의 결정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온다. 류의 하얀 손에서 흘러 내리는 것과 같은 그 액체는 얼마 후 땅속으로 완전히 흡수 되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응.” “.......걱정했다.” 무릎을 굽히고 자신의 앞에 주저 않은 류의 눈동자가 잿빛의 긴 속눈썹 사이로 사라졌다. 따뜻한 체온과 함께 다가온 피냄새에 샨은 기분 좋은 온기를 느꼈었다. 류 옆에 있으면 라쉬로서의 절망감도 약한자로서의 울분도 청량한 공기에 파묻히는 것처럼 그렇게 일순간에 모든 것이 증발 되어 갔다. 자신의 배를 따뜻한 천으로 감싸주는 류의 손길에 샨은 단단한 가슴에 기대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 “....흑...흑..흐윽...” “.........네 잘못이 아니야.” “......으윽....흐...흑.” “.....그만 울어. 착하지.” “흑...나 따위....너무 싫어....전부 내 탓이야.” “...이겼어. 신경 쓰지 마. 너는 할 만큼 했어. 잭도 진저도 이안도 모두 무사하니까 걱정 마.” 류는 무뚝뚝 했지만 어쩌다 한 마디 내 뱉을 때마다 사람 마음을 참 따뜻하게 해줄 줄 하는 남자였다. 수태로 인해 부풀기 시작한 배를 만지작 거리며 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타닥타닥 타고 있는 모닥불에 지푸라기를 던져 넣자 화르르 하며 아름다운 불꽃으로 화한다. 벌써 어스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는 걸 보니 앞으로 한 시간도 채 안되서 밤이 되어 버릴 것 같다. k 카오스의 숲에서 살아 남은 생물은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 돌연 변이로서 온순하게 보이는 작은 토끼라 해도 꽤 위험한 생물이었다. 그래서 비록 토끼라고 해도 맨손으로 잡다가는 숨겨진 날카로운 이빨에 손가락이 잘리는 일이 태반이었다. 류가 기척을 죽인 채 사냥감을 노려보다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던 날카로운 침을 날리자 풀을 뜯어 먹고 있는 토끼가 한순간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진다. 가까이 다가가 토끼의 목에 꽂힌 침을 푹 찔러 넣고 단도를 꺼내 토끼의 입을 벌리자 예상대로 3cm가 넘는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난다. 생각 같아선 몇 마리 더 잡아 가고 싶지만 이미 어스름이 짙게 깔린 데다 부상을 당해 혼자 있는 샨이 걱정되어 류는 토끼를 한 손에 쥔 후 우거진 나무 사이를 재빠르게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중량감과 혈향에 류는 언젠가의 영상을 떠올렸다. 가디언의 후보로 뽑혀 자격을 인정받기 위한 테스트를 받았던 날 류는 처음으로 이안과 만났다. 온통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의 사파이어 눈동자는 투명하고 부드러웠지만 결코 웃고 있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는 상당히 인상적인 느낌을 가진 인간이었다. 부드럽지만 건조한 느낌.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닌데 그 화려한 외모와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상반되는 바삭거리는 눈동자, 또래의 소년보다 한 뼘이나 큰 키 등이 그를 돋보이게 했다. 같은 팀을 짰던 적은 없지만 연습장에서 여러 번 부딪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는 있되 특별히 말을 걸거나 하는 친분은 없었지만 가끔 생각지도 않게 눈이 마주쳤던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그 몇 번의 응시 속에 아주 뜸하게 한 두번은 이안의 눈동자가 웃고 있다는 느낌이 미약하게 들기도 했었던 것 같다. 검술. 사격술. 정신능력. 격투기. 냉정하고 날카로운 판단력. 군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유한 그는 무수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출세가도를 달리더니 19살 때는 최연소로 장교에 임명 되었다. 그가 장교에 임명되는 날 나는 그의 부관이 되었고 우리 팀은 적을 참혹하게 전멸 시켰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길고 긴 전투가 끝난 후 모두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며 알코올에 취해 있었다. 시체가 나뒹구는 숲 한가운데서 사냥한 토끼와 들짐승을 껍질을 벗겨 구워 먹는 그들의 모습은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실전인 전쟁과 살육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소년티를 벗지 못한 나에게는 엄청난 쇼크였다. 빨갛게 가죽을 벗긴 토끼에서 떨어지는 시뻘건 핏물을 보는 순간 속이 뒤집어 지는 느낌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와서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빠져 나와 인적이 없는 깊은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기를 뜯고 있는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번들거리는 기름이 내 안의 결코 참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을 자극한 것 같았다. “우욱....우욱...콜록.” 몸 속에 있는 더러운 독을 뽑아 내듯이 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냈다. 온몸에 배여 있는 역겨운 피 냄새에 가슴이 벌렁 거렸다. 언제나 사람을 벨 때 마다 가슴 한구석이 쪼그라 드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들은 적이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였다. 어째서 이런 무의미한 전투를 반복해야 하며 나는 또 얼마나 이 손에 피를 묻혀야 할까. 무자비한 전투로 희생된 누이를 위해 다시는 그런 아픈 상실을 맛보기 싫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전쟁이 싫어서, 생명을 지키고 싶어서 가디언이 되었는 데 어느새 나는 허울 좋은 대위명분 하에 살육을 저지르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이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 지 알 수 없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혈향이 나날이 나라는 존재를 파먹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 참 동안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비워 내고 있을 때 미묘하게 틀려진 공기의 느낌에 뒤돌아보자 나무에 기대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안의 눈과 마주쳤다.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는 지 모르겠지만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 응시당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토기가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것이 느껴졌다. 장교로서의 첫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화려한 연회의 주인공이 되어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인적이 드문 그 곳에 있었는 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고 엘리트 용병이라 불리는 가디언 주제에 한낮 토끼고기를 보고 토하는 나약하고 한심스럽기 그지 없는 사실에 대해서 무언가 변명을 해야 했지만 그저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나를 응시하는 그를 조용히 쳐다보고 만 있었다. 숲은 상당히 고요했고 하늘에 떠 있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와 풀 숲 사이사이에 배여 있던 혈향을 정화시켰다. 하얀 군복을 입은 이안은 그 상태로 오랫동안 나를 응시하다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곧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피가 난다.” “........” 이안의 시선을 쫓아가자 왼쪽 어깨부분이 살짝 칼에 베어져 검은 군복을 더욱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른 손을 들어 올려 살짝 감싸자 그가 팔을 뻗어 그런 내 팔을 떼어내고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환부를 후벼팠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자 이번에는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같은 가디언은 처음 봐. 피에 경악하고 죽음이 무서우면서 왜 굳이 여기에 남아 있는 거지?” “......” “대답해.” “.....피와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야.” 오히려 무서운 건 나 자신. 나날이 죄책감 때문에 파 먹혀 지는 심장. 옭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이성. 그러고도 계속 이 곳에서 버티고 있는 난 과연 무엇을 위한 가디언인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힘겹게 이 자리에 서있는 거지? 그런 의문들이 스스로를 사정없이 몰아쳐 가고 있었다. 이안은 사각거리는 투명한 눈동자에 약간 힘을 주며 나를 쳐다봤다. “......너 답군.” “....무슨 뜻이야?” “스나이퍼로서의 사격술. 비쉬로서의 격투기. 상황판단 능력 등으로만 판단한다면 최고의 가디언이지만 정신적인 부분이 터무니없이 약해. 3년이나 훈련을 받고도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버리지 못했다니 넌 정말 희귀한 생물이야. 류 아리마사.” 방금 전 내가 토하고 있던 것을 새삼스럽게 비웃는 것처럼 그의 입 꼬리는 드물게 휘어져 있었다. 최고의 군인인 그에게 가디언으로서의 자질을 적나라하게 지적당하자 얼굴이 뜨거워져 왔다.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고 살짝 고개를 젖히자 낮은 웃음소리 까지 들려왔다. “...이만 가겠어.” 수치심에 귓가를 파고드는 나른한 웃음소리를 외면하며 돌아서자 부드럽게 손목이 붙잡혔다. 무심결에 뒤돌아보자 그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흰 빵과 약간의 육포. “..쓰러지기 전에 그거라도 먹던가.” 전투가 시작된 초기에나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게 믿기 어렵다. 과연 장교라는 건 감투 뿐 인 게 아니로군. 구역질 때문에 거의 5일간 물 이외에는 먹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내밀어진 그것들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식사 때....내 숙소에 와도 좋아. 조금 더 남아 있으니.” 왜 내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지. 아니 그보다 내가 그동안 별로 먹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힘들다. 이안의 부관이 되긴 했지만 나는 거의 모든 전투의 최전선에서 싸웠고 가까이에서 그를 보필하는 이는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이안은 자신을 쳐다보는 나의 눈에서 그런 의문을 읽어 냈는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니까.” 달싹거리는 그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해독하지 못한 채 야영지로 돌아갔다. 오랜 시간 동안 연마된 감각이 등 뒤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게 했지만 끝까지 뒤돌아 보지 않았다. 3년의 훈련동안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 처음 가지는 접점이었다. 늘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라인 밖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좁혀진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허기에 지쳐가면서도 결국은 한번도 그의 숙소로 찾아가지 않았고 어느새 전투는 끝나버렸다.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아무렇지도 않게 동료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피 냄새가 진동하는 밀림에서 살아있는 육고기를 사냥한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 안색이 파리한 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보였지만 그 미소아래는 불안과 초조가 숨어 있었다. 혹시 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한 걸까. 안심시켜 주려고 잡아온 토끼를 한 구석에 던져 두고 약간은 뻣뻣한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쓰다듬어 주자 샨은 고개를 내 가슴에 파묻으며 허리를 세게 끌어안는다. ....귀엽다. 미미하게 떨면서 내게 매달린 있는 샨을 어떻게 달래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무언가에 밟힌 듯 가지런했던 풀들이 이러저리 누워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흔적으로 보아 분명 성인 남자의...그것도 무술에 상당히 단련된 남자의 발자국임에 틀림없었다. 시선을 내려 슬쩍 샨을 살펴보자 확실히 복장이 흐트러져 있다. 게다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피 냄새. 아까와는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누군가....왔었어?” “아니.” 즉시 돌아오는 대답.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살아남은 비쉬들이 샨을 발견한 거라면 녀석은 이렇게 멀쩡할 수 없다. 숲에서 발견했을 때 처럼 처절하게 능욕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을 거다. 하지만 샨은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기는 해도 상처 입은 곳 하나 없다. 가만히 녀석의 눈을 응시하자 맑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시선을 피한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내게 무언가를 감추려는 모습에 서운함을 느끼며 잡아 온 토끼를 다듬었다. 내가 믿음 직하지 못한 걸까....역시 인간은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좀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존재 인 것 같다. 내가 가진 비밀을 샨에게 이야기 하면 샨도 내게 지금의 거짓말에 감춘 진실을 말해줄까? 능숙하게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빼내면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샨의 시선이 느껴졌다. “류. 너는 왜 내 곁에 있는 거야?” “.....동료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궁색하기 그지없는 낯 뜨거운 변명이었다. “....나도 비쉬였으면 좋았을 텐데....그럼 적어도 이런 꼴로 네게 기대 있지는 않을 거잖아....” 샨은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자책하지만 오히려 나는 조금 기뻤다. “쓸데 없는 말 하지마. 라쉬가 없으면 비쉬도 없어. 넌 단지 부상자 일 뿐이야. 그런 구분은 상관 없어.”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늘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나를 바라보되 결코 다가서지 않는 녀석이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다가갈 용기는 없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은 정말 겁쟁이 였기에 가까워 지는 간격보다 멀어지는 간격을 더 크게 느끼며 두려워했다. “페어라서 그런 말 해줄 필요 없는데....나는 내 역할을 잘 아니까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난 너를 페어로만 생각하지 않았는 걸. “.......넌 필요한 사람이야.” 넌 내게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야. “.......” 말재주가 없어서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너는 그래.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많은 위안이 되고 마음이 편해지는 온기가 있는 사람. 마치 그 기분 좋고 따뜻한 그 느낌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 “.......” “나는 누군가를 죽이는 전투를 하지만 너는 누군가를 살리는 전투를 해. 그 차이를 모르겠어? 난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곁에 있는 거지 페어의 의무감 때문에 곁에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안했으면 좋겠다. 부상으로 인해 불안 한 건 알겠지만 우리는 결국 이 숲을 무사히 빠져 나갈 거니까.” 말을 길게 한 탓에 목소리가 빡빡하게 굳어져 있다. 하긴 그게 아니라도 샨의 앞에선 언제나 긴장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굳어 버린다. 손질한 토끼를 장작불에 구으면서 어줍지 않은 내 말에 대한 샨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폈다. 녀석의 다리 부상역시 심각하지만 더욱 심각한 건 수태로 인한 쇼크 인 것 같다. 남성의 수태는 여성의 임신과는 달리 강압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 지고 신체적인 차이로 인해 여성의 배는 더 고통스럽다. 4개월 만에 출산이 이루어지고 배가 부푸는 것 말고는 신체적인 변화가 거의 없지만 수태가 되는 순간 자신을 범한 남성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완벽히 속박 당하게 된다. 수컷의 본능으로 자신의 수태 대상을 알 수 있는 비쉬들은 라쉬가 엄청난 출산의 고통을 이겨낸 후 살아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서 자신의 노리개로 삼았다. 샨 같은 경우에는 한 명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서 여러 명에 의해 공유된다는 게 다른 점이지만. 나는 샨이 그런 꼴을 당하기 전에 상대가 된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생각이다. 아아.....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때때로 소름끼친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후 샨에게 한 조각 내밀자 한 입 베어문 후 오물거리며 씹는다. 기름으로 반질거리는 연한 핑크색의 입술이 매혹적이다. 혀를 낼름거리면서 토끼 고기를 먹고 있는 샨을 보자니 아랫도리가 뜨거워져 오는 게 느껴졌다. 전투에 참가한 이후 제대로 욕구를 풀어준 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자신도 결국 다른 비쉬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자조하며 씁쓸히 고개를 돌렸다. “류는 안 먹어?” “.....먹어.”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는 맛있었지만 위는 받아 들이지 않는다. 엉망진창으로 당해서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한 순간의 통증이 되새겨 지면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자신 역시 비정한 정부에 의한 희생양이지만 라쉬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용당할 수 있을 만큼 다 이용당한 후 버려지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라쉬들 만큼 능욕 당하지는 않는다. 국가를 위한 다는 명목 하에 가디언을 만들고. 시하임까지 만들어 내는 간악한 인간들에 치를 떨면서도 그 아래에 예속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게 분노한다. “류.” “.....응.” “라쉬들 사이에 도는 소문 같은 것들....류는 잘 모르지?” 뜬금없는 샨의 말에 돌아보자 샨은 싱긋 웃음 지으며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네가 라쉬들 사이에서 어떻게 불리는 지도 모를거야. 그치?” “.......그래, 몰라.” “....하하. 너 다워. 세심한 편이지만 정작 주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어떤 소문일까. 어두워서 기분이 나쁘다거나, 지나치게 말이 없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으면 한다. 사실이긴 하지만 샨에게 자신이 그런 이미지로 새겨지는 것은 참을 수 없이 싫으니까. 불안한 내 마음을 전혀 눈치 못채는 샨은 초록색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생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 너랑 페어를 짜게 되었을 때 다른 라쉬 녀석들이 얼마나 날 부러워 했었는 지 아냐? 다른 비쉬들과는 달리 너는 굉장히 신사적이었으니까 우리 사이에선 정말 특별했었어....네가 검은 군복을 입고 복도를 지나갈 때면 모두들 훈련하다가도 널 쳐다보느라 정신 없었지. 네가 이안처럼 고위 귀족의 후손이 아닐까 멋대로 상상하고 그랬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하하. 그래도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 너랑 자고 싶어 하는 라쉬들이 줄을 섰었는데 넌 정작 아무 관심도 없었지. 그게 서운하기도 하고 멋져 보이기도 했어. 페어를 짜기 위해 널 처음 봤을 때 내가 얼마나 긴장했었는 지 넌 상상도 못할거야.” “.......” 나도 심장이 떨려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네가 내 쪽에 서줬을 때 기뻤다. 지난 2년간 페어로서의 정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 해도 응. 정말 기뻤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난 남겨져야 하는 데 진저를 그렇게 만들면서 까지 내 편에 서준 네가 고맙고 또 미안했어. 동료를 소중히 생각하는 너 다운 행동이었지만 난 가슴이 두근거려서 터져버리는 줄 알았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샨의 말을 고백으로 해석해도 괜찮은 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매혹되어 버린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카오스의 숲이 만들어낸 환청이 아니기를 바라며 숨을 가다듬었다. “....페어로서의 정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긴장으로 인해 혀가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아 입안에서 튀어나온 말은 내 귀에도 지나치게 무뚝뚝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런 내말이 들리지 않은 듯 샨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나한테만 묘하게 다정하게 구는 너를 많이 좋아했어. 나를 부러워 하는 다른 라쉬들의 눈빛을 느낄 때마다 우월감에 소름이 돋았다. 제일 가까운 곳에서 너를 바라보고 알아가면서 나만이 너를 독점하고 있다고 느꼈어. 그래서 만약에...수태를 한다면 네 상대이고 싶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랬었어. 비록 이 꼴이 되어버렸지만......지나친 욕심이지만...그래도 상상하는 것 쯤은 괜찮잖아.” 시원한 풀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푸르스름한 달이 나와 녀석을 비춘다.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희미한 피냄새를 맡으며 갑작스러운 샨의 고백에 내 심장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동요한다. 정작 시선을 뺏기고 있던 사람은 나였다. 손에 피를 묻히는 매일 매일 속에서 따뜻한 시선과 밝은 미소에 침식당해 정작 가슴앓이를 하는 쪽은 이 쪽이었다. 가디언에게 동료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물러터진 나라도 군인으로서의 행동과 의무를 자각하고 있었다. 녀석이라서...샨이라서 진저와 잭을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감싼 것 뿐이었다. 샨이 알고 있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남자였다. “그만 둬. 이제.” 샨이 한마디 라도 더 하면 나는 이성을 잃고 수태를 한 녀석을 덮쳐 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 숨기고만 있었는데....이제는 말하고 싶어. 네가 날 이상한 눈으로 볼까봐 말 못하고 전전 긍긍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다 털어 버릴래. 이렇게 까지 네가 날 생각해 준다면 말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아.” “......” 그만 둬 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샨이 무언가를 말하면 힘겹게 지키고 있던 내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샨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무모했고 또 용감했다. “류, 나는 널 사랑해.” 혈관 속을 흐르는 온 몸의 피가 심장으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짜릿한 전율에 호흡이 가빠져 온다. 둘만 남은 이 공간에서 솔직하게 부딪혀 오는 녀석을 감당하기 힘들다. 무엇이 샨을 이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순식간에 나를 집어 삼키는 감정의 홍수에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맑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대답해 주지 않아도 좋아. 류. 동료애든 동정이든 네가 날 아껴주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있으니까 무리할 필요 없어. 그냥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 있던 감정이 터져 버렸다고 생각해줘. 계기가 뭐든 중요한 건 그것인 것 같아. 네가 날 거절한다고 해도 멀리한다고 해도 정작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을 내 마음이니까 말이야.” “..........” 그런 거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대답 같은 거 멋지게 할 수 있을 만큼 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걸.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지금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샨을 와락 끌어 안아 버렸다. 팔딱거리며 뛰는 녀석의 심장이 가슴위로 전해져 오는 것과 동시에 부들부들 떨리는 작은 몸이 느껴졌다. 나보다 더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샨은 끝까지 말해줬다. 작고 통통한 몸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다....샨.” “.......” “나도.....그런 것 같다.” 목소리가 흉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낯선 숲의 열기에 의한 환상이라 해도 이것만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 내 말 한마디에 샨의 몸이 움찔하더니 허리에 팔이 감겼다. 흙이 엉켜서 뻣뻣한 금발에 키스하면서 녀석을 더욱더 세게 끌어 안았다. “동료라서가 아니야.” “.....류?” “오해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네가 생각하는 나와 조금은 다를지 모르지만 나 역시.....마찬가지.....야.” 마찬가지. me too.........I love you. 유일한 말인 것 같다. 표현력 없고....멋없는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사랑 고백은. 네가 먼저 말해 줘야 간신히 내뱉을 수 있는 한 마디. “...거....거짓말.” “..거짓이 아니야.” 그래서 거짓일 수가 없어. “....믿을 수 없어. 네가 이렇게 평범하고 아무것도 없는 날 좋아할 리 없잖아. 잘 봐 류. 나 샨이야. 너와는 달리 뛰어나지도 않고 외모도 그저 그런 샨이라고. 네 추종자 중 한 사람이란 말이야. 너를 상대로 멋대로 혼자 상상하고 자위하고 그러던 샨이라고. 가슴 떨리게 널 짝사랑하던 나니까 함부로 거짓말 하면 안 돼. 나 믿어 버릴지 모르니까.” “.......믿어도 좋아...정말.” 그리고 넌 내게 그저 그런 사람이 야니야. 넌 네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얼마나 예쁜 줄 모르는 구나. 웃을 때마다 살짝 접히는 눈꼬리가 얼마나 귀여운 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통통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인식하지 못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라구. 어깨가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엉망으로 울고 있는 샨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필사적으로 내게 매달리는 녀석을 안아주자 내 품에서 바르작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맑은 에메랄드 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 “.......” “.....너도 그러면......안아 줘. 류.” “...!...” “정말 날 좋아한다면 안아 줘. 그러면 불안한 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으니까. 수태를 해서 꺼림칙하겠지만 제발 안아 줘. 널 내 현실로 만들어 줘. 이 밤이 지나도 넌 내 곁에 있을 거라고 확신 시켜줘.” 샨은 군복 안에 손을 집어 넣으며 내 피부를 매만졌다. 차갑게 식어 있던 피부가 녀석의 손바닥이 닿는 순간 뜨겁게 달아 오른다. 내 눈치를 살피며 군복을 벗기는 녀석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일그러진 얼굴로 웃는다. 가느다란 목에 입 맞추면서 조심스럽게 녀석의 내 허벅지 위에 앉혔다. 볼록하게 부푼 배가 복부에 닿아 온다. 한손으로 그 배를 조심스럽게 쓸면서 보드라운 입술에 키스하자 사탕을 조르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매달려 온다. “....아이 태어난다면....네가 좋다면....내 이름 줄게.” “....!....” “그러니까 고통스럽더라도 이겨 내라. 같이 있어 줄 테니까.” 너를 안심 시킬 수 있는 말. 가족이라는 건 정말 중요한 거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집합이니까 그런 관계로 너와 묶이고 싶어. 쭉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어. 비정상 적인 출산의 고통 때문에 수태를 한 라쉬들의 70퍼센트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하지만 샨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니까. 매끄러운 피부의 촉감을 즐기며 손가락으로 샨의 비부를 만지자 흠칫 몸을 떨었다. 자극적인 애무를 퍼부으면서 작은 돌기를 손가락으로 짓이개자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몸을 튕긴다. 따뜻한 애널 안으로 들어간 손가락을 휘저으니 느껴지는지 허리를 흔들기 시작한다. 천천히 손가락 개수를 늘린 후 잔뜩 흥분한 나를 밀어 넣었다. 샨의 안은 생각보다 더 끈적끈적하고 뜨거워서 들어간 순간 쾌감에 뇌가 흐물흐물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날의 샨은 뭔가 이상했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감정을 터뜨리던 녀석. 불안한 눈동자로 안아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 순수한 눈동자에 눈이 멀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채 카오스의 숲이 보여주는 환각과 열정에 져버렸다. 너무나 이상하던 밤. 칠흑처럼 변한 밤의 숲에서 들려와야 할 몬스터의 울음소리와 작은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그 밤에 나는 샨을 뜨겁게 안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샨과 나는 연인 관계가 되었다. 카오스의 숲에서 달콤한 생활을 만끽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었는데 귀환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끝없이 서로를 탐닉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위해 사냥을 하고 우리를 습격하는 몬스터로부터 녀석을 지키고 마음껏 사랑한다. 샨의 발목은 거의 나아갔지만 나날이 배가 많이 불러와서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항상 동굴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샨은 때때로 무언가에 대해 굉장히 불안해하고 두려워 했지만 처음 맛보는 따스함과 편안함에 취해 나는 그런 사실에 대해 둔감해져 있었다. 그저 수태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냥에서 돌아올 때마다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필사적으로 내게 매달리는 녀석을 멍청하게도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녀석의 몸을 위해 최대한 욕구를 억누르고 있는 나를 매일 밤 채근하며 안아주기를 원하는 샨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볼록한 배를 어루만지며 결국 하룻밤 내내 울려 버렸다. 통통하고 부드러운 살집이 손바닥에 감기는 느낌과 촉촉한 눈동자와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맺힌 눈물, 발정기의 고양이 울음을 닮은 신음성. 모든 것이 나를 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극상의 행복감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지 3주 째 되는 날 완전히 깨어졌다. k 카오스의 숲에 차가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모든 생물은 동면에 들어가고 굶주림에 지친 몬스터 들이 더욱더 날 뛰기 시작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밀림은 전체가 늪지대로 변하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했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다. 우기가 시작되면 적어도 7일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샨을 동굴에 남겨 둔 채 혼자 사냥에 나왔다. 축축한 빗줄기가 시야를 가릴 정도였지만 투두둑하는 소리를 내며 푸른 잎사귀에 떨어지는 물방울 끝에선 시원하고 기분 좋은 풀내음이 퍼져 나왔다. 으르릉 거리는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을 신중하게 살피면서 아직 동면에 들어가지 않은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동굴에 혼자 남겨 둔 샨이 걱정되긴 했지만 라쉬인 그로서의 방어능력을 믿었기에 눈앞에 나타난 모처럼의 사냥감들을 포기 하지 않았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몬스터(변형 동물)들은 평소보다 더 흉폭하고 지랄 맞았고 또 강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어깨를 찢고 지나가는 것을 생생히 느끼면서 연한 뱃가죽에 칼을 찔러 넣자 다른 한 놈이 뛰어 올라 내 팔을 물었다. 누런색으로 빛나는 눈깔에는 먹이에 대한 광폭한 탐욕이 흘러넘치는 것을 무감정하게 쳐다보면서 허벅지에 차고 있던 총을 꺼내 그대로 머리를 갈겨주자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세찬 빗줄기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핏자국들을 씻어 내리면서 밀림 속에 은은한 혈향을 퍼지게 한다. 그와 동시에 모처럼의 피냄새를 맡은 몬스터 들이 꾸역꾸역 밀려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몰라서 장검을 샨에게 맡긴데다 더 이상 총알을 낭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격 무기로서 단도를 택했다. 집단적으로 내 목덜미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녀석들에게 칼끝을 세우며 익숙한 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몸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열기가 서서히 피부위로 침투해 올라왔다. 두꺼운 가죽 아래 칼을 박아 넣고 잔인하게 그어 올리자 몬스터의 몸이 반으로 찢겨져 나갔다. 처참한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집단 적으로 달려들던 놈들 중에 하나가 살해당한 동족에게 달려 들어 그 살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얼마 후 또다시 놈들 중 몇이 공격을 멈추고 그 무리에 합류한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동족의 시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몬스터의 모습에 참을 수 없이 구역질이 올라왔다. 공격 대상을 바꾼 몬스터 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차례차례 공격하며 잡아 먹는 동안 나는 손에 넣은 사냥감들을 가지고 샨이 기다리고 있을 동굴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 새 동료를 다 먹어 치운 모양인지 다시 나를 추격해 오는 몬스터들을 하냐 하나 제거해 나가는 동안 희미하지만 샨이 있는 방향에서 비명소리를 들려왔다. 그 순간 불안감으로 인해 심장이 팔딱거리면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다리가 떨려 왔다. 얼굴을 할퀴는 나뭇잎들을 정신없이 베어 가면서 우거진 밀림의 숲을 빠져나가려고 미친 듯이 몸부림 쳤다. 얼마나 뛰었는지 목이 하얗게 말라오고 숨이 턱까지 차왔지만 결코 멈출 수 없었다. 미쳐버린 이 숲에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사냥 따위 나오지 않을 걸 그랬다. 행복감에 취해 머뭇거리지 않았으면 지금쯤 이 숲을 빠져 나갔을 지도 모른다. 마침내 동굴 근처에 이르렀을 때 후각세포를 마비시키는 지독한 피 냄새에 가슴이 바작바작 타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폐포가 쪼개지는 고통을 참아내며 거칠어진 호흡을 숨 가쁘게 내뱉었다. 여기저기에 낭자한 핏자국이 샨의 것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면서 천천히 동굴 쪽으로 다가갔을 때 우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 한 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날카롭고 누런 이빨이 물고 있는 하얀 팔을 발견했을 때 내 안의 무언가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렸다. “아악!!!!!!!!!!” 뜨겁고 위험한 본능이 껍질을 깨고 나온 순간을 나는 분명히 인식했다. 미쳐버리고 싶었지만 그 순간의 나는 결코 미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뿌옇게 내 전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어버린 느낌이었다. 손이 멋대로 움직이면서 기묘한 표식을 만들어 내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가느다란 선이 손 끝에 맺힌 후 공중을 향해 뻗어 나가자 하얀 팔을 뜯어 먹고 있던 몬스터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찢기면서 더러운 피가 새빨간 안개를 만들어 냈다. 그와 동시에 동굴 안에서 여러 마리의 몬스터 들이 튀어 나왔다. 피로 얼룩진 그들의 누런 이빨과 흉흉하게 빛나는 누런 안광이 내게 가까이 오기도 전에 갈기 갈기 찢어진다. 몸을 적시는 물방울은 차가웠지만 내 몸은 이해할 수 없는 열로 펄펄 끓어올랐다. 손가락 끝에서 뻗어져 나오는 은색 실이 빗방울조차도 부셔 뜨리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휘감았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피가 주는 역겨움이 어느새 더할 수 없는 쾌감으로 변해 억누르고 있던 본성을 일깨웠다. 저벅. 저벅.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자잘하게 흩어지는 순간 나는 줄곧 부정하고 있던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흩어진 몬스터들의 시체 속에 섞여 있는 하얀 인간의 손가락과...팔...다리의 조각들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에 차마 만지지 못하고 눈을 돌려 버렸다. 우적. 우적. 동굴 안에서는 아직까지 게걸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가자 머리를 처박고 살을 파먹고 있던 몬스터 한 마리가 고개를 들며 내게 으르릉 거렸다. 그리고 그 놈 아래에는 시뻘건 고깃덩이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누워 있었다. 팔다리가 찢겨진 채 내장을 파 먹힌 시체는 더할 수 없이 참혹하고 역겨워서 도무지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토기 때문에 동굴의 차가운 벽면을 짚고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쏟아냈다. 내게 이를 세우던 몬스터는 위험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허기를 참지 못해서인지 그런 나를 무시하고 다시 시체의 배 부분에 머리를 처박고 살을 뜯어 먹기 시작한다. 아닐 거야. 샨이 아닐 거야. 절대 그럴 리 없어. 다른 녀석 일 거야. 그 녀석은 라쉬인 걸. 몬스터 따위에게 쉽게 당할 리 없어. 분명 몸을 피했을 거야. 스스로를 달래며 그렇게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찰나 피에 젖은 금발이 눈에 들어오면서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신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눈을 감으려 해도 감을 수 없었다. 깜빡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여러 개의 영상이 인식되었다. 붉은 멍이 남아 있는 발목. 찢겨진 황토색의 군복. 연한 금발. 마지막으로 내가 준 은제의 군용 목걸이가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마침내 나는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나 자신까지 잃어 버렸다. 멍하니 누워 천장만을 바라본다. 동굴천장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이 내 얼굴위로 툭하고 떨어지자 흠칫 몸이 떨려 왔다. 동굴안은 온통 피 냄새로 진동을 했지만 나는 조금도 움직 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돌리면 원망을 가득 담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나를 덮쳐 올 것만 같았다.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려 귓바퀴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가까이에 누워 있는 샨이 지금이라도 살아나서 나를 죽여 줬으면 좋겠다. 몬스터의 피와 살점으로 더럽혀진 동굴 벽을 쳐다보면서 고요한 정적 속에 나는 천천히 죽어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차갑고 무서운 죽음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한 온기가 다정하게 손 내밀어 왔다. “류.” 부드럽지만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분명 기분 좋은 울림. 그 목소리는 모든 것을 공명시키며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고 집요하게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이 상태 그대로 영원히 죽어 있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서늘한 체온은 쉴 새 없이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내다 잠시 동안 얼굴의 구석구석을 천천히 매만지다 떨어지더니 곧 부드러운 입술이 식어가던 내 입술을 덮어왔다. 살짝 벌어진 메마른 입술사이로 뜨겁고 촉촉한 혀가 침투해 들어왔다. 눈꺼풀 위로 느껴지는 뜨거운 입김이 죽어가고 있던 나를 천천히 삼키기 시작한다. 피를 머금고 있는 군복이 벗겨지고 단단하고 매끄러운 맨살이 직접적으로 닿아온다. “....아....” 유두가 강하게 빨려지는 순간 찾아온 쾌락에 본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얼어버렸다고 생각한 내 손가락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감아올리고 있었고 기분 좋은 체온에 집착하며 정신없이 그 몸에 자신을 비벼댔다. 점점 농밀해 지는 애무로 인해 아랫도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을 떠. 류.” “........” 긴 손가락이 내 분신을 부드럽게 감싼 후 강하기 쥐어짜는 순간 고통에 경련하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런 내 눈동자 위에 붉은 입술이 키스를 퍼부었다. “....류....” “......” “류 아리마사.” “......” “내가 누구지?” “.....” 아름다운 바다 빛 눈동자 속에 격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격렬한 파도에 휩쓸려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반사적으로 몸을 떨며 고개를 돌리자 억지로 내 턱을 잡아 챈 후 시선을 마주쳐 온다. 마치 늪처럼 깊숙이 빠져 들어 다시는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답해.” “.......” 멍하니 있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 쪽이 타버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자 다시 귓가에 감미롭게 속삭인다. “류..” “..으윽...” “.....아리마사.” “하아...” “..그래......도망치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망쳐.” “...아...”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목이 졸려오는 것과 동시에 어깨에 박혀 있던 칼이 심장 쪽으로 그어내려 진다. “.....그 어떤 곳에서도 항상 난 너와 함께 일 테니까.” 광기에 물든 푸른 눈동자가 무감각하게 얼어가는 뇌신경을 자아 뜯고 풍부한 울림을 담은 부드러운 목소리는 청각을 마비시킨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원망. 울분으로 굳어가던 전신이 마치 유리파편처럼 산산조각으로 깨어진다. 인식한다는 건 무서운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싫은 것을...무서운 것을 머릿속에서부터 지워버리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버리는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이 만든 그 견고한 벽을 깨부수려고 하는 존재였다. 파괴자.-killer 그리고 지키는 자-guardian killer or guardian 그 아슬아슬한 경계부분에 서 있던 나. 눈물이 쏟아져 나와 시야가 흐려졌다.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 지 조차 알지 못하고 계속 울었다. 술이 가득 담겨져 있던 오래된 푸대가 터져버리듯이 긴 시간 동안 질식당해 있던 감정이 갑자기 폭발했다. 몸 안에서 새어나오는 피와 함께 그것은 커다란 물줄기를 이룬다. 나는 누구.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지? 알기 싫다. 알아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앞의 존재는 그 모든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 걸어 잠근 문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나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 “왜...우는 거지....내가 널 아프게 해서?” “.......흑....” “....하지만 넌 그 이상으로 지독했잖아.” 마치 어린애 같은 투정. 넌 아마 내가 모르는 사람. “쉬...그만 울어.” “...으흑...” “......우는 얼굴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지금 넌 나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화가 나.” “......” “....지금 당장 네 목을 물어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진심을 말하는 푸른 눈동자. 살짝 일그러진 미간. 순식간에 상대방을 압도하는 존재감. 그리고 그 모든 것 속에 담겨진 나른한 살기. 그래 이...특유의 느낌. 그래. 난 널 알고 있는 것 같아. “.....이안.” 목이 심하게 갈라진 듯 새어나온 목소리는 상당히 쉬어 있었다. “...그래.” 환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후벼 파던 단도가 빠져 나가면서 아찔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이안....” “.....응.” 아름다운 눈매가 휘어지면서 따뜻한 혀가 다시 내 입안에 들어와 끈적하게 내 혀를 빨아올린다. 내 중심을 자극하던 이안의 손가락은 기교 좋게 귀두를 쓰다듬은 후 갈라진 끝을 손톱으로 후벼 팠다. 고통을 동반한 쾌감에 몸을 튕기며 신음을 흘리자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내 벨트를 풀더니 곧 따뜻한 점막이 내 것을 착 감아 왔다. 오돌도돌하고 따뜻한 혀가 내 것을 강하며 빠는 느낌에 눈앞이 아찔해져 왔다. 극과 극의 행동을 오가는 녀석. “이안....레이시하.” 좁은 목구명 안까지 파고 들어 가던 것이 샅샅이 핥아 진 후 이빨로 자극 당하자 참을 수 없는 쾌락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윽...흐윽...” 내 신음이 몇 번이나 메아리치며 동굴 속을 울린다. 마치 달디단 과즙을 빠는 것처럼 그가 그렇게 나를 빨아 들였을 때 문뜩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과 함께 무의식적으로 음란한 교성이 튀어 나왔다. “샨!!!!”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의 행동이 멈췄다. “.......” 식지 않은 흥분이 온 몸을 갈작갈작 갉아 먹으며 그 뒤의 행위를 재촉하지만 그는 숨조차 쉬지 않는 듯 아무소리도 내지 않은 채 내 위에서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응시하는 투명하고 푸른 보석이 시리도록 아름다워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 보려 하자 그는 돌연 눈을 감고 사파이어를 봉인한다. 마치 무생물처럼 미동도 없어서 파르르 떨고 있는 옅은 갈색의 긴 속눈썹 만이 그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동안의 침묵 후 붉은 입술이 달싹거리면서 내뱉은 말은 섣불리 이해가 가지 않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너는...그렇게....” 헐떡 거리면서 뱉어내는 한마디 한마디가 왠지 가슴 한 켠이 찡해져 왔다. “....너는 내가....그렇게.....” 목이 꽉 잠겼는 지 이안은 그 뒤의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그 대신 참았던 숨을 살짝 내뱉으면서 다시 내 분신을 자신의 입에 담았다. “..아....” 뜨겁고 촉촉한 입안이 나를 끈적하게 품어 오면서 나른한 쾌감에 몸이 뒤틀린다. 동굴 안에서 끝없이 메아리 치는 나의 음란한 신음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욕망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안의 새하얀 이가 내 끝을 살짝 물었을 때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녀석의 입안에서 정액을 쏟아냈다. “기분이 어때?” “......” “....그 녀석과...많이 다른가.” 무슨. “달라도 할 수 없어. 넘겨 줄 생각.....없으니까.” “........” “잊어.” “......” “괴로우면 잊어라....버티지 마.” “.....”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 달콤한 유혹. “죄책감에 잡아먹히지 말고 그냥 잊고 살아.” “......” 그것은 마치 이브를 유혹하는 달콤한 독이 발린 뱀의 혀와 같았다. “네가 힘들다면 도와 줄 테니까.” 심장이 녹아버릴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동자. 아이 같은 웃음. “.......네 눈물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해.” 우울해 보이는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 보며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주문 같은 말들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그의 입가로 흘러내리는 미처 삼켜지지 못한 내 체액을 혀를 내밀어 그 흔적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안이 어떻게 나를 찾아 내었는 지 그리고 찾아낸 나를 어째서 제거하지 않는 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떤 형태로건 나는 잊고 싶었고 벌을 받고 싶었다. 나의 부주의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 샨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러서 아무라도 좋으니 내게서 대가를 취하고 면죄부를 내려 줬으면 했다. “다리를 벌려. 류.” “......” 아무런 저항감 없이 다리를 벌리자 단단하게 흥분한 이안의 중심이 내 비문을 쿡쿡 찔러왔다. 샨과의 관계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처음부터 비쉬였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역할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넓게 벌린 다리 사이로 질척한 소리를 내며 이안의 분신이 내 몸을 가르고 들어오자 묵직한 고통에 몸이 덜덜 떨렸다. 생각한 것보다 더 지독한 고통이었다. 이안은 그런 나를 끌어 세게 끌어안으면서 단번에 뿌리 까지 집어넣더니 거친 피스톤 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흑...읏....아...” 단단한 근육들이 부딪히면서 만들어 내는 열기와 쾌락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몸 안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안의 페니스에 극상의 쾌감을 느끼면서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져 왔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이안이 거칠게 다루어 주기를 원했다. 동료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멋대로 팀을 이탈하고 샨의 죽음을 방조한 죄를 내게 묻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내 뜻과는 달리 뇌수가 녹아버릴 것 같은 쾌감만을 주면서 내 몸속을 마구 헤집었다. 비음이 섞인 신음과 음란하게 연결되어 있는 부위가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스스로에 대한 수치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침내 이안이 몸을 떨며 내 안에 정액을 토해 냈을 때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사정을 해 지친 몸으로 몸 안에 가득 찬 그의 모든 것을 흡수해 갔다. k 섹스가 끝난 후에도 그는 자신의 것을 뽑아 내지 않은 채 나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가만히 몸을 일으켜 잠든 이안의 모습을 내려다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머리카락 색과 같은 옅은 갈색의 긴 속눈썹과 하얀 피부. 자는 모습의 그는 너무나 천진해 보여서 잔인한 그의 본성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모습이 심지어 귀엽다고 까지 생각하는 자신에게 놀라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하얀 정액과 함께 이안의 페니스가 몸에서 빠져 나갔다. 음란한 그 광경에 얼굴을 붉히며 일어서는 순간 미끄덩거리는 무언가가 손에 만져 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피에 젖어 있는 하얀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 붉게 물들어 있는 금발머리가 심장을 뜨끔하게 찌른다. 잊으려고 했던 현실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순간 심장이 쿵쿵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확인하지 말아야 한다. 저 것을 확인 하고 나면 나는 완전히 망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본능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히고 있었다. 갑자기 덮쳐올 쇼크에 대비해 숨을 참은 뒤 물어 뜯겨 있는 목을 천천히 내 쪽을 향해 돌렸다. 나로 인한 원망에 부릅떠 있는 눈이라면 내 손으로 직접 감겨주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마주한 샨의 얼굴은 원망으로 인해 부릅뜬 눈도 아니었고 평안하게 감겨진 눈도 아니었다. 지독하게 슬퍼 보이는 이미 초점을 잃어버런 에메랄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 순간 날카로운 바늘이 심장을 찔러왔다. “....샨.” 온 몸이 잔인한 이빨에 물어 뜯겨 엉망이었지만 얼굴만은 귀여운 그 형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자국과 텅 비어 버린 슬픈 초록색의 눈동자가 나를 서럽게 한다. 의식적으로 멈추고 있던 시간이 흘러가면서 얼마 전의 일을 다시 리플레이 시켰다. “........샨.” 떨리는 손가락으로 녀석의 눈을 감겨 주려고 했지만 이미 굳어버린 근육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동자가 담고 있는 감정 들을 읽어내기 무서워서 마지막으로 녀석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 지 아는 것이 두려워서 손바닥으로 샨의 눈을 가렸다. 차갑게 식어 있는 피부가 내 손에 의해 천천히 녹아간다. 툭하고 떨어진 내 눈물이 죄스러워서 손으로 그 흔적을 지우려고 얼어 있는 피부를 쓸어내려는 데 수태로 부풀어 있던 배가 참혹하게 파헤쳐져 있는 것을 쳐다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봇물이 겉잡을 수 없이 흘러 나왔다. 너덜너덜한 상처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깨끗한 자상.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면서 불길한 영상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을 때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끌어 당겼다. “.....묻고 싶은 게...있어.” 목소리가.....잘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에 의해 먹혀 버린 것처럼. 두근두근. 쿵쾅쿵쾅. 심장아 차라리 터져 버려라. “........” “너.....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지?” 그래서 내가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게 해줘. 생각이라는 걸 하는 머리를...뇌를....이성을 전부 망가뜨려 줘. 처음 사냥을 갔다 온 날 남아 있었던 풀숲에 남아있던 무술 유단자의 발자국. 많이 불안해 하던 샨.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로 얼어버려 끝없이 안아주기를 원했던 녀석. 하얀 몸에 남아 있는 지나치게 깨끗한 자상.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지려고 하고 있었다. “대답해. 이안 레이시하.” “........” 두근. 두근. “대답해!!!!” “......네 눈물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닦아내는 하얀 손가락과 다가오는 붉은 입술에 소름이 돋았다. “...류.....” 달콤한 목소리에 온 몸의 혈관이 미쳐 날뛴다. “....어째서...” “.........잊어.” “왜 그런 거냐.” “상관없는 녀석이야. 네가 슬퍼할 필요 없어.” “헛소리 집어쳐!!!!!!!왜 그랬냐고 묻잖아!!!!!왜!!!!어째서!!!!!!!” “....그걸 몰라서 묻는건가.” “뭐?” “넌 전부 다 알고 있잖아. 류 아리마사.” “.....무슨.” “단지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이지.” 두근. 두근. 악마가 내 귓가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설명해.” “.......천만에. 너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아. 확인하기 두려운 거겠지. 이미 의식하고 있으면서 굳이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이유가 거기 있잖아. 류.” “......” “무서우면 도망치라고 했어. 완전히 도망치기 힘드면 도와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물러서. 네가 깨어지는 것 원하지 않아.” “대답해.” “.....무엇을?” “...왜....어째서...샨을...죽인거야?” “.......” 아무잘못도 없는 그 애를 왜...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였어? 대체 왜! 뭐 때문에! “....그렇게 물으면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 녀석의 멱살을 잡은 채 노려보자 이안은 깊이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더니 다크 블루로 변한 눈동자로 나를 차분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본능이었다.” “...!...” “녀석의 뱃가죽을 찌르는 순간 희열이 느껴졌지. 그 이상의 설명을 원한다면 포기해.” 늘 보고 있었던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것도 보잘것 없는 라쉬 놈 하나 때문에. 가디언에 어울리지 않은 여린 심장을 가진 놈. 사람을 죽일 때마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구역질을 하는 류 아리마사는 살육자의 심장을 타고난 그와는 정 반대의 인간이었다. 전사로서의 능력은 엘리트였지만 물러터진 마음과 약한 정신력을 가진 주제에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버티려는 놈이 재미있었다. 물론 그만이 아는 그 모순적인 부분 외에도 류는 매력적인 녀석이었다. 짧은 잿빛 머리칼에 차분한 은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핸섬하고 단정한 외모. 강한 수컷을 냄새를 풍기려는 일반 비쉬와는 달리 녀석에게는 절제되어 있는 고상함과 금욕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의 출신을 모르는 자는 라쉬들은 고위 귀족의 자제나 사생아일거라고 쑥덕거렸고 비쉬들은 그런 소문들을 비웃으며 같잖은 시기와 치졸한 질투로 녀석을 무시했다. 이안 스스로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늘 류를 지켜보면서 여려빠진 심장에 수없이 생채기를 내면서도 한시도 칼끝을 늦추지 않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 3지구 출신의 고아. 국경근처의 근처에 사는 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의 누이도 사소한 전투의 희생자였다. 그런 이유로 입대를 결심하다니....뼛 속 깊이 군인인 이안으로선 류의 입대 동기가 시시하고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별 볼일 없는 이유로 가디언이 된 녀석이....사람을 죽이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여린 녀석이 능력자도 버티기 힘든 훈련을 3년이나 버텨낸 후 자신의 부관이라는 지위까지 올라섰을 때 이미 류에 대한 그의 탐욕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눈을 감을 수도 시선을 돌릴 수도 없을 정도로 참을 수 없이 매혹되어 버렸다. 항상 피에 젖어 있으면서도 결코 혈향을 풍기지 않는, 자신이 빼앗은 목숨의 무게만큼 눈물을 흘리는 류라는 인간이.....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그의 모습이 더 할 수 없이 고결하고 순결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몸을 떠는 그가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 “.....차라리.....팀을 이탈 할 때 죽이지 그랬어? 왜 지금에 와서 이런 건데.....내가 아닌 샨을....어째서....녀석은 잘못이 없어.....네게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어. 그러니까 헛소리를 집어쳐....제대로 설명해.” 나에게 다가온 건 네가 먼저 였다. 늘 지켜보기만 했는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버티면서까지 내 옆에 섰다. 그래서 쳐다보기만 하는 것을 그만 뒀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손에 넣을 수 있는데 항상 일정 거리 밖에 서있는 너를 보고 있는 동안 화가 났다. 참을 수 없이 갈증이 났어. “이해를 못하고 있군. 류.” “........” 우아한 회색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눈물을 생성해낸다. 군인이 눈물이라....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다고? 감히 내게서 널 채어갔는데도?.” “........” 자신의 손길이 닿은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자 이안의 아랫도리가 점점 뜨거워져 왔다. “애새끼를 배서 부풀어 오른 배를 감싸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 우스웠지. 그래서 그 배를 칼로 난도질 했다. 뱃 속의 애새끼가 네 핏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고통없이 죽여 줬을 텐데....멍청한 놈이었어.” “.....그만 해.” “네가 원한 거야. 끝까지 대답해 줘야지.” “......싫어.” “네 이름을 부르는 게 짜증나서 폐를 살짝 찔러주자 입을 뻐끔거리면서 고통 스러워 하더군. 그래서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몬스터들에게 던져 줬다.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건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을 거야. 킥.” “...그만 둬! 그만 두란 말이야. 이 악마!!!!!” 이성을 잃은 류가 손에 수인을 맺으면서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류가 능력자였다는 것은 녀석이 이성을 잃은 상태로 몬스터를 해치우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류의 공격력은 이안의 예상을 넘은 것이었다. 가느다란 은색의 실 같은 것이 류의 손끝에 맺혀서 파지직 거리며 빛을 내더니 순식간에 이안에게 뻗혀온다. 그 실이 스쳐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순식간에 형체가 사라졌다. 능력자의 공격패턴이나 그 방법 등은 개인에 따라서 다 다르지만 류가 가진 능력은 우습게도 이안과 비슷한 것이었다. 어떤 것을 계기로 자신이 능력자 인 것을 깨달았지만 그 능력이 가져다주는 결과물을 두려워해서 언제나 안으로 눌러왔을 게 분명했기에 갑작스럽게 폭발한 그의 공격은 거칠고 예상하기 힘들었으며 무질서했다. 하지만 격렬한 분노를 토대로 만들어진 공격은 한계를 모르고 폭주하는 말처럼 무모하고 강한 반면 빈틈 역시 많은 법. 이안이 심장을 향해 날카롭게 감겨 들어오는 은색 실을 피하면서 단도에 힘을 실어 류의 어깨를 향해 날리자 그는 몸을 살짝 뒤틀며 공격을 피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공격을 순간적인 본능으로 피할 만큼 뛰어난 반사 신경만은 칭찬해줄 만 하지만 류의 털끝 하나하나까지 파악하고 있는 이안과는 달리 류는 이안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전투 때 본 내 능력이 전부 인 줄 알았겠지. 이안이 짧게 혀를 차며 손가락 끝으로 푸르스름한 실을 내뻗어 허공에 박히려는 칼의 방향을 살짝 조정하자 처음 노렸던 류의 어깨에 은색의 칼날이 파고 든다. “윽..” 연결된 실 사이로 힘을 실어 보내자 류가 고통으로 인해 입술을 깨문다. 몸의 신경이 모두 절단 되는 느낌이겠지. 이렇게 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장밀 머리 끝까지 화나게 했어. 깊숙이 박히는 칼날에 새빨간 피가 나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안은 벽에 기대 있는 류의 목에 손을 감았다. “돌아 올 거라고 생각했다.” “......으...” “그래서 기다렸지.” “....미.....친....새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정말 미친놈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자 단정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숨통이 막혀서 괴로울 텐데 은회색의 눈동자에는 죽음의 공포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격하고 끓어오르던 분노가 잔잔하게 가라앉아가는 느낌. 그 시선이 자신의 등 뒤에서 나뒹구는 시체에 머무는 순간 이안은 류의 어깨에 박혀 있던 칼을 더욱 깊이 찔러 넣었다. “그 눈으로 나만 쳐다보고 그 입술로 나에게만 입 맞춰.” “윽...이거 놔!” 격렬하게 부벼지는 입술과 혀로 인해 입안 구석구석이 쾌감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며 녹아 버리는 것 같다. “나는 분명 그 꼬마 녀석에게 경고 했었다.” 공포에 질린 녹색 눈동자를 그 자리에서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통통하고 흰 살결을 칼로 다 벗겨내서 씹어 먹고 싶었다. “네가 그 별 볼일 없는 놈 때문에 팀을 이탈하고 나서 잭과 진저도 죽였어. 그 이유도 설명 해줄까?” “......놔! 놓으란 말이다....읏...”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입술을 사정 없이 물어 뜯자 새빨간 선혈이 뚝뚝 흘러 내린다. 아름 답다. “...너와는 달리 내게 살인은 정당화 되어야 할 이유가 없어. 거슬리면 죽이고 수틀리면 죽여. 죄책감 따위는 없다. 그저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들면 그걸로 끝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류?” “몰라. 네가 뭘 말하고 있는 지...난....하나도 모르겠어.” “하...그래...그럴 수도 있겠지...모를 수도 있어....그렇다면 넌 너 자신이 뭐라고 생각해?” 손아래 움켜진 하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류의 부드럽고 토실한 귓불에 이를 세워 잘근 거렸다. “...컥...” “평화를 지키기 위한 수호자(guardian)일까.” “.....으....” “.........피에 얼룩진 파괴자(killer)일까." ",,,그만....“ “하지만 그런 구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 넌 늘 지키는자 (guardian)이고 싶어했지만 결국 파괴자(killer)로 불려졌지. 스스로를 괴롭히고 망가뜨리면서 까지 무엇을 지키고 싶은 건가. 누구를 위한 수호자이고 누구를 위한 파괴자 인거지? 너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만...” “스스로를 죽이면서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제발....” “어리광 부리지 마. 살인은 내가 한 거다. 그 꼬마 녀석도 내가 죽였어. 그러니 너에게는 책임이 없어.” “웃...기지...마.” “......하긴. 질투로 돌게 만들었으니까 조금쯤은 원인제공을 한 건가?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네가 이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듣기 싫어. 닥쳐!” “.......넌 그냥 지금처럼.....내 앞에서만 울고 나에게만 분노 하면 돼.” “......그만.......” “..그러면 불평하지 않아. 더 이상 누군가를 죽일 생각도 없어.” “....미친 소리 하지 마. 내가 왜 네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하지? 너의 판단 근거가 나여야 한다는 정의가 뭐야. 왜 내 소중한 사람이 너에게 희생 되어야 해? 왜!!!!내가 네게 뭘 잘못했어? 뭘 잘못했냐구!” “........” “.......” “......니까..” “........”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뭐?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넌 내게 잘못한 거야.” 툭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원하지 않아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내 전부가 되어버리니까....내 중심이 너가 되어 버렸으니까 내 판단기준도 정의도 가치관도 심장도 전부 네가 되어 버렸어.” “닥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안타까움과 갑갑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거센 소용돌이 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절대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연애 감정을 가진 모든 이들이 그런 것처럼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잘못 아는 거라고...그렇게 결론 내렸어. 그냥 오래 보고 있다 보니까 착각한 거라고....그래 어쩌면 단순한 자기 암시와 착각일지도 모르지.” “.......닥치란 말이야. 이 미친 새끼야! 그만해!!!!!!!!그만 하란 말이다. 그딴 말로 널 정당화 시키지 마! 네 행동이 옳을 수 있다고 여기지 마. 그 말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 “...네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것이 진실이야. 네가 알고 싶어 하던 것. 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지만.” “누구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래.” “웃기지 마. 너는 날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런 추악한 감정을 내게 밀어 붙이지 말란 말이다!!!!!” “.......” 미친 새끼. 정말 미친 새끼.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샨이....그...귀엽고..깨끗하고 밝은 샨이....나 때문에 죽었다. “....추악한가....그럴지도 모르지.” 동굴 속을 몇 번이나 메아리치며 돌아온 절규에 찬 내 목소리에 이안은 씁쓸한 얼굴로 낮게 지껄였다. 담담하기 까지 한 그 음성에 분노의 감정이 가슴을 태우며 목구멍 밖으로 꾸역꾸역 터져 나오려고 한다. “.......고작 그런 이유로 넌 샨을 죽였어. 미치광이 살인마.” “그래....고작이라는 단어일 수도 있겠지. 너에게는.” “......내 말이 틀렸어? 결국 알량한 네 만족과 독점욕 때문에....그 애를 죽인 거잖아.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네가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거 잖아. 부정하려 하지 마. 싸구려인 네 감정을 과대 포장하지 마.” “.....부정할 생각 없어. 조금 다르지만 완전히 틀리지는 않으니까..” “절대 용서 안 해.” 용서 못해. “.......네 말대로 싸구려에다......” 네 까짓 게 뭔데....네 감정 따위가 뭔데... “...추악할지 몰라도....”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녀석이...... “......그래도 절실했다.” 그런 말 한다고 해서 조금은 알아 줄 거라고 생각해?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내 연인을 죽인 비열한 살인자의 변명 따위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릴 거다.” “.......그래.” “샨....이 고통스러웠던 것의 몇 천 배로 고통스럽게....죽여 버릴 거다.” “.....원하는 대로 해.” “.......” “....이 내가 비명을 지르며 네게 목숨을 구걸할 때까지 나를 파괴 시켜 봐. 너를 만지는 이 손을 잘라내고 너를 쳐다보는 이 눈을 뽑아내고 간악한 말을 지껄이는 이 입술을 뭉개버리고 너를 향해 뛰는 이 심장을 산 채로 도려내서...더할 수 없는 고통에 치를 떨게 해봐.” “...!...” “.....너를 눈에 담은 걸...후회하게 만들어 봐.” 두근. “....그런 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두근. 두근. 격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감정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또 무서워서 온 몸에 오도독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넌 이상해.” “그럴지도 몰라. 난 원래 어딘가가 결여된 인간이었거든. 너에게 이런 울렁거리는 느낌을 가지는 것조차 생소해. 누군가를 위해 눈물 흘리거나 슬퍼해 본적 없어. 그래. 확실히 난 미친 데다 이상할지도 몰라.” “.......”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미친 듯이 날뛰던 살기가...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쭉 함께 있고 싶었다.” 손이...발이....온 신경이 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정말로...그래.” 이안도 혼잣말 하는 것처럼 조용히 되 내이더니 내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널 죽이면 다 끝날까. 이 잡을 수 없는 혼란들이?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널 보지 않았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다.”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야....큭...콜록.” “....몰라....” “........” 창백하게 질려가는 피부가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이안은 더욱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제발.....부탁이니까.....” “..컥...그..만...” “나를 쳐다보지 않을 거라면....” “콜록..” “그 무엇도 그 눈 속에 담지 마.” “...!...” “네가 그러면 나는 참을 수 없어 지니까....” 약간은 슬퍼 보이는 사파이어 눈동자가 폐부를 찔러오는 것 같아 류는 눈을 감고 이안을 차단했다.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여지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돌려 졌다. 짐승 같은 자세로 엎드린 채 다리가 벌려지고 이윽고 몸이 열렸다. 거대한 이물감에 몸서리 치며 온몸으로 그를 밀어 내려고 해도 저주스러운 그것은 꾸역꾸역 류의 몸을 파고 들어왔다. 마치 뜨겁게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삼켜져 온 몸이 타 들어 가는 것 같았다. “으읏.” 어깨의 단도가 뽑히며 엄청난 피가 몸 안에서 쏟아져 나오자 류는 지독한 현기증과 함께 몽롱한 쾌감을 느꼈다. 머리로는 거부하려고 해도 유두가 손가락으로 인해 희롱되고 페니스가 자극되는 동안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움찔거려며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류의 매끈한 등에 입 맞추면서 이안은 그의 발목을 잡아끌며 더욱 깊숙이 자신을 박아 넣었다. “...!...” 발 끝에서부터 찌르르 타고 올라오는 괘감에 몸을 뒤트는 순간 류의 벌어진 입 사이로 붉은 알약하나가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내 뱉으려고 하자 억지로 라도 삼키게 하려는 듯 집요한 혀가 탐욕스럽게 입안을 헤집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류의 의식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상처의 고통과 피를 말려버릴 것 같은 죄책감과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이 한 덩어리로 엉켜서 아우성을 칠 때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만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을 감아 외면하려고 해도 끝없이 파고드는 몸 안의 존재와 죽을 것 같은 쾌락만이 그의 정신과 육체를 좀 먹어가서 부정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이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하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기억의 파편들. 밝은 금발과 순수한 에메랄드의 빛. 따스한 온기. 맑은 웃음소리. 피비린내와 살타는 냄새가 가득했던 전장. 그 속에서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버티고 있던 나.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누나와....샨. 눈을 멀게 하고 구토를 일으키게 하는 붉디붉은 빛. 마지막으로 차갑고 아름다운 사파이어가 의식을 완전히 잠식했을 때 모든 것이 백지처럼 지워 지면서 하얀 잔상만이 류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 지 모른다. 때때로 깨어났던 것 같지만 여전히 자신을 꿰뚫고 뒤흔드는 쾌감에 몽롱해져 스스로도 의식을 지웠다. 그런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는 순간 류는 자신의 몸이 점점 이상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침입해 들어오는 거대한 이물감에 반사적으로 아래를 조이며 따뜻한 체온을 끌어안는 순간 떨어져 나가는 작은 기억 하나. 그리고 몸 안으로 흡수 되는 뜨거운 체액에 또다시 하나. 그렇게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기억들이 완전한 조각을 이루었을 때 류는 완전하게 의식을 잃었다. ‘.....널 영원히 매어 둘 거다.’ 얼마 의 시간 후 백지가 된 류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그 한 문장 뿐이었다. 이상한 느낌을 가진 목소리였다. 안타까우면서도 절절했지만 그 한편에는 씁쓸한 한숨이 묻혀 있었다. 누굴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차가운 느낌. 버석거리는 건조함 속에 부드러움이 녹아 있는 푸른 사파이어. 아니....좀 더 초록빛 계열의 기분 좋은 느낌일지도. 몸을 일으키자 검은 군복이 어깨에서 흘러 내렸다. 어깨에 붕대가 감긴 것을 보니 전투에서 부상이라도 입었나. 뿌옇게 흐려진 기억이 유쾌하지 않다. 다리 사이에 흥건히 묻여 있는 피와 정액을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리던 류는 살짝 부풀기 시작한 자신의 배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가디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긍지와 명예 그리고 생존이다. 그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는 고고한 정신, 강한 마음을 필요로 하지만 자신은 그와 정 반대의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문을 품고 방황하고 힘들어하고 망설이는 약하디 약한 인간. 그래서 어쩌면 지금의 이 모습이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위화감이 느껴져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지만.... 언제나 비쉬였던 자신이 어느새 라쉬로 변해 버린 것인지에 대해 류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허리띠에 꽂아 뒀던 칼날을 자신의 배 위에 세웠다. 무엇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 단편적인 것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매우 슬프고 허망했었던 것 느낌만이 남아 있다. 푸르게 날이 서 있는 칼날을 지그시 누르자 피부가 베어 지면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 칼을 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혀끝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끝없이 맴돈다. “.........” 하지만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이나 혀를 축이면서 그 끝에 맴도는 말을 입 안으로 삼켜냈다. 고개를 흔들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부정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뿌연 의식이 자꾸만 무언가를 기억해 내라고 재촉하지만 본능이 그것을 거부한다. 칼날을 쥔 손이 심하게 떨려 그 아래의 피부가 더욱 깊이 베어지는 순간 후각신경을 자극하는 혈향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욱.”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덩어리가 뜨거워져 가슴부근을 지글거리며 태운다. “우욱.” 머리가 아프다. 왜 이런 곳에 있는 지 어째서 이런 꼴인 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혀끝에 맴도는 이름 하나처럼 가슴을 콕콕 찌르면서도 입을 열어 내뱉지 않는다. 심한 구역질에 가슴을 쥐어 뜯으며 텁텁한 동굴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일어선 뒤 비틀거리며 동굴 입구 쪽으로 걸었다. 환하게 햇살이 비치는 밖으로 나가면 이 꽉 막힌 숨통이 트여서 편하게 호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겨우 입구까지 걸어 나가자 지나지게 밝은 빛에 눈이 아파왔다. 반사적으로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렇게 잠시 서 있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정말 오래도 자는 군.” 낯익은 목소리. 같은 팀이었었나. 같은 팀이라고 해도 전혀 기억에 없다. 그저 나는 전쟁을 혐오하는 가디언이고...언제나처럼 전투에 담겨진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참전해서 어떤 이유로 이곳에 있다는 것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눈을 가린 손바닥을 치우자 시원한 초록색의 수목과 햇빛을 반사하는 맑은 강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 지 촉촉하게 젖어 있는 싱그러운 초록빛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에....정갈한 느낌이 드는 이목구비의....아름다운 인간. “........” 눈을 살짝 찡그리면서 자세히 관찰하려 하자 그가 갑자기 너털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그렇게 내게 다가오는 동안 나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워 그의 기척 하나하나를 분석했다. 분명 적대적인 느낌은 아니다. 군인답지 않은 여유로운 호감까지 느껴지는 그 유연한 분위기에 한 발자국 물러서며 경계하자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짙은 회색으로 보였던 그의 눈동자가 실은 푸른 색이었다는 걸 눈치 채는 순간 심장이 겉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몸의 흥분. “네가....내..상대인가?” “......글쎄.” 애매하게 넘기는 웃음.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건가. “....같은 팀..이었나?” “.......”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마치...의식이 군데 군데 잘려 버린 것 같이....하지만 너는....알고 있었던 것 같군. 왜 여기 있는 지 모르겠지만...머리가 아파서...더 이상은 기억해 내기 힘들어. 토할 것 같아.” “........” 그는 매우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뭔가 팽팽하게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흡사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그런 느낌. “....어떻게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거지? 전투는?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어?” “.....류....” “.......응.” 확실히 내 이름은 류 였다. 류 아리마사. 분명히 익숙한 이름인데 음미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그 뉘앙스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마치 어느 여자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기억나지 않아? 그 무엇도?” “그런 건 아니지만....”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눈에 잠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진실인지 허상인지 알 수가 없어. 마치...꿈에 취해 있는 것처럼...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아. 입고 있는 옷도...팔도...다리도...내 이름도 모두 익숙한데 무언가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이야.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럼 그대로 나둬.” “.......” “....스스로가 기억해 낼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네가 기억하든...기억하지 않든 진실은 변하지 않아..늘 그 자리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 “누군가에게 쉽게 얻은 진실은 때로 너 자신을 짓뭉개 버릴 지도 모르니까. 스스로가 그 무게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었을 때 인식하고 받아들여.” 마치 암시에 걸리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생각하려는 힘을 빼앗아 간다. “.....그럼 네 이름은?” “......” 순식간에 커지는 검은 홍채와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은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이름을 모르면 널 부르기 곤란하니까...” “......”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아무말 없이 돌아서려는 그의 팔을 잡아 채면서 재차 묻자 잠시동안 사파이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눈꼬리가 미미하게 떨고 있다고 느낀 건 아직 빛에 익숙하지 못한 내 눈의 착시 현상일까. “네가...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 “......기억할 수 있다면...”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 마음대로 불러도 된다는 말인가?” “그래.”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약간은 감정에 들뜬 표정으로 나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는 내 입술을 바라봤다. 그런 그의 표정에 약간 긴장이 되었다. 뭔가 굉장히 기대 받고 있는 느낌. 나 자신은 이런 창조적인 일에는 그다지 익숙한 인간이 아니었던 지라 더욱 그랬다. 한참을 망설이다 어쩔 수 없이 아까까지 혀 끝 에서 맴돌던 이름을 내뱉기로 했다. 그것은 까끌까끌하지만 매우 부드러운 기분 좋은 느낌. “.......샨.” 내가 말한 이름에 그의 눈동자가 일그러지다 곧 입꼬리를 올려 묘한 웃음을 지었다. 휘어지는 눈매와 살짝 감기는 속눈썹은 아름다웠지만 그 웃음과는 반대로 굉장히 아픈 눈동자를 하고 있어서 금세라도 깨어질 것 같았다. 위화감. 갑자기 나를 안고 있는 강인한 팔이 단단하게 죄어 와서 가슴이 갑갑해 졌다. “다시...불러봐.” “.......” 하얀 손가락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려는 걸 어색하게 피하자 이번에는 입술을 부딪혀 왔다. 그와 내가 이런 관계였던가. 확실히 몸에 남은 흔적을 보면 나는 그동안의 자신을 버리고 라쉬로서 그를 받아 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특별히 연인을 만들거나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그의 행동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망설이고 있자 이번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단편적인 것 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가디언인 나를 마치 깨어질 까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그 이상한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갑작스러운 내 웃음소리에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백치미가 흐를 것 같은 푸른 눈동자와 햇빛에 반사된 엷은 갈색 머리카락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류?” “응.” “지금...웃은거냐.....” “...어..” “....날..보고 웃은 거야?..” “....그런 것 같은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 불신감이 담겨 있었다. 뭐야. 연인이면서 이 녀석에게 웃어주는 것에 그렇게 인색했었나. 원래 잘 웃지 않는 타입이긴 했지만. 그는 한참동안 일렁거리는 꽉 찬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더니 곧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나를 끌어 안았다. 따뜻하게 전해져 오는 체온이 낯설었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내가....너의 샨이라서 웃어준 건가?” “...?...” “....뭐 상관 없겠지. 무엇으로 불리건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니까.” “......난 네게 다정한 연인이 아니었나.” “....다정하게 대해주길 바란 적 없으니까 상관없어. 너와 나 사이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그래도...니가 날 보고 웃는 걸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 앞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 “응. 절대로 내게 웃어 주지 마.” “.....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군.” 보통....연인관계라는 건 같이 있으면 기분좋고....따뜻하고 행복해서 자연스럽게 웃게 되는 게 아닌가. “네가 더 이상 나를 보고 웃지 않을 때가 오면 난 너를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릴 지도 몰라.” 자신보고 웃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 자신은 더 할 수 없이 환한 웃음을 짓는다. “..........이상해. 넌.” “....알아. 그래도 네 곁에 있는 건 나야.” 내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부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서 숨이 막혔지만 군복이 축축하게 젖어 오는 것이 느껴져서 그대로 내버려뒀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기분 좋은 초록빛의 신록 속에서 녀석에게 어색하게 안긴 채 한 참 서 있다 손을 내밀어 어깨부분을 살짝 끌어안자 그대로 나를 땅바닥으로 쓰러뜨린 채 키스를 퍼붓는다. 환한 태양아래 벗겨지는 옷가지들을 멍하게 쳐다보면서 뜨겁게 닿아오는 피부를 끌어안았다. 가슴 시리게 하는 사파이어 눈부신 태양빛-sunny 내가 줄곧 원하고 있던 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주 중요한 정말로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밀림속의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반사된 태양 빛에 현기증을 느끼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내가...너의 샨이야.” 건조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그는 내게 웃지 말라고 했지만....그래도 난 그의 품에서 몇 번인가 기분 좋게 웃었던 것 같다. & 너를 눈에 담는 순간부터 언제나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순결하고 고결한 너를 지키고 싶은 욕심과 함께 솟구치는 음습한 파괴욕. SHINE(샨)-sunny 미치도록 증오스러운 이름. 다정한 목소리의 구속. 나를 많이 아프게 하는 너. 그토록이나 증오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어 지는 것이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버린 나에게 내리는 잔혹한 형벌이라도 해도 네가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난 너와의 순간순간들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겠지. 잔인한 유예. 네 기억을 지우려 했음에도 네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허무하게 끝나버릴 게 분명한 관계이지만 그래도 그 때까지 넌 나만의 것이니까. 슬픔에 잠긴 네가 상실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져 버린다고 해도,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널 완벽히 가질 수 없다 해도 난 언제나 같은 선택을 할 거다. 너의 다정한 수호자(guardian)일 수 없다면 잔혹한 파괴자(killer)로서 널 잠식해 버릴 거다. g-n by IAN